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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생각

요셉의 꿈은 몽상이나 비전이 아니다

요셉의 꿈은 몽상이나 비전이 아니다

                                     

                                              고은교회 황부일 목사


  꿈이란 말을 사전에 찾아볼 것 같으면 두 가지 의미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잠자는 동안에 생시 같은 현상을 느끼는 착각이나 환각을 말하는데 이것을 영어로 드림이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흔히 쓰는 비전이라는 말로 실현될 가능성이 좀 있거나 아니면 전혀 없는 허무한 바램이나 기대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어로 드림이나 비전이라는 용어가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로 쓰이는 때가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주로 미래에 대한 포부나 희망이나 장래에 대한 구상이나 이상을 말할 때입니다. 그래서 보면 “꿈을 가져라”, “큰 꿈을 품어라”와 “비전을 가져라”, “비전이 있다” 등을 같은 의미로 쓰고 있음을 봅니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꿈에 대해 신앙적으로 매우 무지하거나 잘못알고 있음으로인해 잠자는 동안에 꾼 비현실적인 몽상을 하나님의 계시로 안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나름대로 가지며 품는 기대적인 비전을 하나님께서 실현시켜 주시는 것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요인은 많은 신앙의 지도자들이 요셉의 꿈을 그렇게 해석하며 설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면 요셉을 꿈을 가진 사람, 꿈을 품은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그렇게 꿈을 가진 사람만이 그 꿈의 실현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아예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요셉의 꿈을 그렇게 멋대로 적용하여 교인들에게 알려줌으로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나 심지어 신앙의 지도자들까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상태를 출세하고 성공한 자의 사례로 모본삼고 그렇게 큰 자로, 높은 자로, 머리가 되는 자로 기대를 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이렇게 알고 소개한다면 정말 성경을 모르는 무지한 자요 엉터리로서 많은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이며 구원의 신앙을 방해하고 혼잡케 하는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야곱의 열 한번째 아들로서 야곱의 편애를 받아 형들로부터 미움을 샀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으로 노년에 얻은 아들로서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당시 왕 직이나 귀족들이 입던 채색 옷을 요셉에게 지어 입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형들이 자기들보다 아버지가 요셉을 특별히 편애함을 보고 요셉을 미워했고 또한 그에게 대한 언사가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창 37:3-4). 그런 상황에서 요셉은 꿈을 꾸었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함으로 형들의 미움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형들에게 고하는 요셉의 꿈을 보면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 하더이다”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의 꿈은 “해와 달과 열한별이 내게 절 하더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들은 형들은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하며 그를 더욱 미워했고 아버지 야곱은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내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하면서도 야곱은 요셉의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했습니다(창 37:5-11). 요셉의 꿈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품은 것도 아니고 포부로 자신이 가져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언약 적 계시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이 완성되기까지 나타내어 보여주시는 계시의 방법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으로서 그리고 주의 사자들을 통한 대언적인 전달로 하셨고 그리고 꿈이나 환상으로도 계시하여 주었습니다. 주로 구약에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시는 수단으로서 꿈을 사용하셨습니다. 보면 야곱에게도 하나님은 꿈을 이용하여 그에게 찾아오시고 언약을 하셨고(창 28:12), 사사 기드온이나 다니엘 선지자등 꿈을 통해 하나님은 정하신 바를 예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민 12:6). 신약에서도 보면 요셉에게. 동방박사에게도 하나님은 꿈을 통해 그의 뜻을 지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가운데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꿈과 오늘날 우리들이 보통 꾸는 꿈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보통 인간들이 꾸는 꿈은 인간의 마음  속에 형성된 생각의 재현이나, 또는 감각과 기억의 연결로 나타나지는 것이나, 사람의 생활과 현실 또는 관심되는 일이나 사건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무의식 속에 꿈 가운데로 작용되어 나타나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런 꿈은 그대로 비현실적인 몽상이고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꾼 꿈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어 만들어진 한 계시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계시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된 이후로는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언약과 성취를 다 말씀으로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 하셨다했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하여 하나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인 계시를 다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계 1:1-2).

  요셉의 꿈은 넓게 말하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 가는 하나님의 계시선상에 있는 것이었고 부분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기업의 실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계시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들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하리니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13-14).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것은 구원의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먼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꿈은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예고였는데 그것은 요셉에게 알려주시는 사적인 미래의 상태가 아니라 오실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점진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앙의 지도자들은 이 꿈을 보통 사람들이 꾸는 꿈처럼 말하거나 아니면 미래적 사생활을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것으로 보면서 지금도 꿈을 예언처럼 여기며 그렇게 해몽도 해주기도 합니다. 또한 오늘날 보면 꿈이나 환상 등을 본다며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적 은사로 말하면서 남의 사적인 삶의 부분까지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점쳐주는 자들 또한 많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언약과 성취에 대한 깨달음이 없거나 아예 거짓된 자들이 거짓된 목적을 두고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적과 기사를 보이며 하나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꿈꾸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고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셨고(신 13:1-5참조), 예레미야를 통해서는 거짓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간교한 것을 예언하며 몽사를 말하며 하나님을 잊게 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선지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며 꿈 얘기를 경계시키셨습니다(렘 23:25-28). 유다서에도 보면 거짓된 자들의 본색이나 모습을 증거 하면서 그들을 경계시키는 말씀이 있는데 거기도 보면 꿈꾸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유 1:8 ).

 

  요셉의 꿈은 몽상이나 비전이 아닙니다. 그가 가진 기대의 환상도, 포부도 아니요 그런 미래적 안목을 가지고 산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도 어떤 지도자들은 요셉을 비전이 있는 사람, 혹은 비전을 가진 사람, 비전을 품고 그것을 잊지 않고 바라본 사람으로 얘기하며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다 요셉이 꾼 꿈 때문입니다. 요셉이 꿈을 꾼 것을 비전을 품었다고 말한다거나 아니면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 말하고 또한 그 꿈을 형들에게 얘기한 것을 가지고 자기 비전을 말한 사람이요, 비전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교계 안에 비전이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쓰여지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 말이 빠지면 얘기가 안 될 정도입니다. 기독교 언론지를 보면 사설이나 교회 소식이나 유명한 자들이 쓰는 칼럼이나 심지어 설교 논단에나 광고에도 비전이란 말이 주제로 나오고 핵심용어로 쓰여지고 어필되는 말로 강조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나열해 보면, 비전캠프, 비전클리닉, 비전센타, 비전교육, 목회의 비전, 비전 있는 교회, 비전찬양, 설교비전, 비전을 가진 자만이 소망이 있다, 주님이 주신 꿈과 비전, 비전 있는 교단과 총회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비전이 없는 자는 내일도 없고 진전도 발전도 성장도 없을 것으로 되어졌고 비전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자처럼 되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된 자들에게서 이런 자기 기대적인 용어가 주축을 이루고 아무런 비판 없이 쓰여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요셉의 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신앙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실현과 자기 기대적 실현과 구분을 못하고 떠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 사람들은 자기 기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막연히 꿈꾸는 자도 있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온갖 방법을 찾아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는 비전이 없다, 그 일은 비전이 안보여, 이것은 앞으로 비전이 있는 혹은 보이는 사업이다”라며 비전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용어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로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하나님 나라로 실현된 교회에 쓰여지게 되었는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다 세상 적이요 인간적인 기대와 기독교 신앙의 차이점을 구분시켜 주지 못하고 사람들의 원함에 다 버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신앙이 안 되는 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비전이라는 말은 인본주의적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은 이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 구별하여 써야합니다. 우리들의 비전은 어디까지나 내 육신의 생각이고 계획이고 소망일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요(롬 8:24), 또한 그것은 일순간적일 뿐이요 그것은 끝없는 욕망을 따르는 것으로 성취해도 만족이 없어 헛된 것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인간들의 계획은 어릴 때부터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 계획이나마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인생의 상태에 있어서는 허무하고 막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할 수 있거늘 어찌 허탄한 자랑을 하느냐고 했습니다(약 4:14-16). 확실한 것은 믿음에 있어 기독교는 자기 비전이 실현되도록 바라며 빌고 믿음을 품는 일반 이상주의 적인 종교가 아니요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그의 나라로 성취되어 가는 구원의 산 종교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구원으로 이루어져가는 복음을 아는 자라면 “청년이여 성도여 비전을 가지라, 비전 있는 교회나 목회를 하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 성공하고 이루어진다는 말은 더더욱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꿈이나 비전을 실현시켜 주려고 찾아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각의 기대를 품은대로 해결해주고 성취해 주려고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전에 작정되고 계시된 대로의 언약을 성취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꿈꾸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분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입고 교회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 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증거 했으며( 사 14:24 )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태 6:10 )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의 계시였고 그리고 그 연약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나중에 형들에게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창 45:7 ). 이러기 때문에 요셉의 꿈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우리의 비전이 아닌 것 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어가는 그의 주권적인 은혜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 가져야할 것은 약속된 복음이요 복음에 합당한 신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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